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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저는 오랫동안 예적금이 가장 안전한 선택이라고 믿었습니다. 뼈 빠지게 번 돈이 하루아침에 반토막 난다는 공포가, 그 어떤 수익률 계산보다 먼저 손을 잡아당겼으니까요. 그런데 지하철 퇴근길에 우연히 흘러들은 한 투자 전문가의 인터뷰가 꽤 오래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돈도 일해야 합니다. 당신만 이불 속에서 나온 게 문제입니다." 그 한마디가 제 적금 통장을 다시 들여다보게 만들었습니다.
이불 속 자산 — 안전하다는 착각
저도 한동안 매달 월급의 30%를 적금에 넣으며 뿌듯해했습니다. 통장 잔고가 늘어나는 걸 보면서 "잘 모으고 있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어느 날 계산기를 두드려 보고 멈칫했습니다. 2년 동안 모은 원금과 이자를 더해봤더니, 같은 기간 물가 상승률에도 못 미치는 수준이었습니다.
실질금리(real interest rate)라는 개념이 있습니다. 여기서 실질금리란 명목 금리에서 물가 상승률을 뺀 값으로, 돈의 실질 구매력이 얼마나 변했는지를 보여주는 지표입니다.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자료에 따르면 2022~2023년 소비자물가 상승률은 연 5%를 웃도는 시기도 있었는데, 당시 1년 만기 정기예금 금리는 최고점에서도 4%대 초반에 불과했습니다(출처: 한국은행 경제통계시스템). 수익률이 마이너스인 저축을 하면서 저는 안전하다고 착각했던 셈입니다.
주식으로 집안을 망하게 한 아버지를 지켜보며 자란 분이라면, 이 이불 속의 안도감이 얼마나 단단하게 자리 잡는지 제가 감히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 공포는 단순한 겁쟁이의 심리가 아니라, 삶 전체가 흔들렸던 경험에서 온 것이니까요. 하지만 그 공포가 정확히 겨냥하는 대상이 무엇인지는 한 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투자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가격에 대한 두려움과 주식 자체에 대한 두려움을 구분해야 한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제가 직접 경험해보니 이 말이 꽤 맞습니다. 아버지 세대의 실패 중 상당수는 우량주를 오래 쥐고 있다가 손해 본 게 아니라, 정보 소문에 흔들려 샀다 팔았다를 반복한 단기 트레이딩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습니다. 주식이 문제가 아니라 방식이 문제였던 것이죠.
- 예적금의 명목 금리가 물가 상승률보다 낮으면 실질 구매력은 오히려 줄어든다
- 단기 트레이딩(뇨동매매)은 주식 투자가 아니라 투기에 가깝다
- 공포의 대상이 '주식'인지 '잘못된 방식'인지 구분하는 것이 출발점이다
DB형 퇴직연금 — 17년을 이불 속에 넣어둔 대가
17년째 DB형 퇴직연금을 유지하고 있다는 사연을 들으면서, 저도 회사에 처음 입사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DB형을 선택했던 기억이 떠올랐습니다. 담당자가 "원금이 보장됩니다"라고 하길래 그냥 사인했죠. 그때는 DC형이 뭔지도 몰랐습니다.
DB형(확정급여형, Defined Benefit)이란 퇴직 시점의 최종 월급에 근속 연수를 곱해 퇴직금을 계산하는 방식입니다. 쉽게 말해, 20년 근무하고 퇴직 직전 월급이 500만 원이라면 500만 원 곱하기 20개월치를 받는 구조입니다. 반면 DC형(확정기여형, Defined Contribution)은 회사가 매년 근로자 계좌에 일정 금액을 적립해주고, 근로자가 직접 운용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DC형의 핵심은 내가 그 돈을 어디에 투자하느냐에 따라 수익이 천차만별로 달라진다는 점입니다.
월급 인상률이 연 3% 수준이라면 DB형의 실질 수익률도 3%에 가깝습니다. 그런데 DC형 계좌에서 주식형 ETF(상장지수펀드)에 투자했을 경우, 장기적으로는 훨씬 높은 복리 수익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금융감독원의 퇴직연금 비교공시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실적배당형 상품의 10년 평균 수익률은 원금보장형 대비 두 배 이상 높은 경우도 있었습니다(출처: 금융감독원).
물론 DC형으로 옮겼다고 해서 무조건 유리한 건 아닙니다. DC형으로 전환한 뒤에도 원금보장형 상품을 선택하는 분들이 적지 않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이 경우에는 이불 속에서 발만 내민 상태라 DB형과 실질적인 차이가 없다고 봐야 합니다. 전환 자체보다, 전환 후 무엇을 담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입니다.
저는 솔직히 DC형으로 바꾸는 것 자체도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퇴직연금은 마지막 보루라는 생각이 워낙 강했으니까요. 그런데 반대로 생각해보면, 오직 하나 남은 그 보루가 일을 하지 않으면 누가 대신 벌어주냐는 물음에 제가 답을 못 했습니다.
ETF 장기투자 — 과일 바구니를 사는 이유
잉여 자금 100만 원 중 20만 원만 ETF에 넣고 나머지 80만 원은 대출 상환과 적금으로 돌리는 방식, 저도 비슷하게 출발했습니다. "일단 조금만 넣어보자"는 심리가 반영된 선택이죠. 그게 틀렸다는 게 아니라, 그 비율을 어떻게 조정해나가느냐가 이후의 결과를 크게 갈라놓는다고 생각합니다.
ETF(Exchange Traded Fund, 상장지수펀드)란 코스피200이나 S&P500 같은 지수를 그대로 추종하도록 설계된 펀드를 주식처럼 거래소에서 사고팔 수 있게 만든 상품입니다. 개별 종목에 투자하는 것이 특정 가게 하나의 지분을 사는 것이라면, 지수 ETF는 시장 전체의 과일 바구니를 한꺼번에 사는 셈입니다. 어느 과일 하나가 썩어도 나머지가 바구니를 지탱하는 구조입니다.
"10배짜리 종목을 어떻게 찾느냐"는 질문을 저도 초반에 참 많이 했습니다. 그런데 그걸 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왜 직접 다 사지 않고 남에게 알려주겠냐는 단순한 질문 앞에서 말문이 막혔습니다. 제가 직접 개별 종목을 분석할 시간도, 전문 지식도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나서야 지수 ETF의 구조가 달리 보였습니다.
장기 투자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건 타이밍이 아니라 출발 시점입니다. 복리(compound interest)의 마법이 본격적으로 발동하려면 시간이 가장 중요한 원료이기 때문입니다. 복리란 원금에서 발생한 이자가 다시 원금에 합산되어 그 합계에 또 이자가 붙는 방식으로, 기간이 길수록 수익이 기하급수적으로 불어나는 구조입니다. 20대에 시작한 사람을 40대에 시작한 사람이 따라잡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물론 "시드가 1,000만 원밖에 안 되는데 30년 묻어두면 무슨 의미가 있냐"는 반론도 충분히 이해합니다. 저도 그 답답함을 압니다. 당장 내년 전세보증금 인상분과 생활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에서 장기 투자 원론이 공허하게 들리는 건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 1,000만 원이 적금 통장 안에서 잠만 자고 있는 것과, ETF 계좌에서 매달 조금씩 복리로 굴러가는 것은 10년 후 꽤 다른 지점에 도달합니다. 완벽한 조건이 갖춰질 때까지 기다리다 보면 출발 자체를 못 하게 된다는 것을, 제 경험상 이건 좀 다릅니다.
자주 묻는 질문
Q. 주식으로 망한 부모를 본 경우, 주식 투자를 시작해도 괜찮을까요?
A. 부모의 실패 원인을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단기 트레이딩이나 뇌동매매가 원인이었다면, 그것은 주식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방식의 문제입니다. 지수 ETF를 소액으로 장기 보유하는 방식은 구조 자체가 다르므로, 두려움의 대상을 정확히 구분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Q. DB형 퇴직연금을 DC형으로 바꾸면 무조건 유리한가요?
A. 반드시 그렇다고 단정하기는 어렵습니다. 월급 인상률이 높은 경우에는 DB형이 유리할 수도 있습니다. 다만 대부분의 직장인처럼 연 인상률이 3% 내외라면 DC형으로 전환 후 주식형 ETF를 운용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나은 결과를 낼 가능성이 있습니다. 전환 후 운용 방식이 결과를 결정하므로, 원금보장형 상품만 담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Q. 지금 주식 시장이 많이 흔들리는데, 지수 ETF를 지금 사도 괜찮을까요?
A. 지금이 저점인지 고점인지를 맞추는 사람은 전 세계 어디에도 없다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장기 투자를 전제로 한다면 타이밍보다 꾸준함이 더 중요합니다. 매달 일정 금액을 자동으로 적립하는 정액분할매수(DCA) 방식을 활용하면 변동성의 영향을 분산할 수 있습니다.
Q. 시드가 1,000만 원밖에 없는데 ETF 장기투자가 의미 있을까요?
A. 솔직히 이건 예상 밖이었습니다. 시드가 작을수록 복리 효과는 느리게 보이지만, 그렇다고 출발을 미루면 시간이라는 가장 중요한 자원을 잃습니다. 1,000만 원이 10년간 연 7%로 복리 성장하면 약 1,967만 원이 됩니다. 출발을 5년 늦추면 그 5년의 기회비용은 회복하기 어렵습니다.
결론
밤 10시가 넘어 조용한 거실 식탁에 앉아 통장을 들여다보던 그 장면이 자꾸 떠오릅니다. 1,000만 원이라는 숫자가 크지도 작지도 않게 화면에 찍혀 있고, 저는 그 돈을 어디에 넣어야 할지보다 어디에 넣으면 안 사라질지를 먼저 계산하고 있었습니다. 그게 이불 속 사고방식이었다는 걸 한참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주식에 대한 공포를 갖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그 공포가 잘못된 투자 방식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주식이라는 도구 자체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인지를 구분하는 것이 먼저라고 생각합니다. 지수 ETF를 소액으로 꾸준히 모아가는 방식, DC형 퇴직연금으로의 전환 검토, 그리고 자녀와 돈 이야기를 함께 나누는 문화를 만드는 것. 이 세 가지가 지금 당장 실천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방향이라는 게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